옛날 이야기로 하자면 나의 기억력은 평균 이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초등학교 시절 '국민교육헌장' 외우기 대회도 나갔을 정도니까(헐~).
40대 이후에 병원에 불려가면 '절망'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걸 몇 년 전에 실감했다.
흔히들 하는 얘기로 국산 기계 40~50년 쓰면 어디가 고장나도 이미 고장이 났을텐데,
그나마 다행인줄 알아라 라고 한다.
10여년 동안 이 놈의 컴퓨터에 빠져 운동하고 담을 쌓고,
일주일에 한번 하는 직원 체육에도 은퇴하고....
그렇게 보존한 몸을 다시 추스리려 등산도 하고 걷기운동도 시작했다.
몸은 일단은 현상 유지를 하고 있는 듯 하다.
문제는 기억력이다.
나에게 특히 이상한 증후는 여성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리저리 강사로 끌려다닌 덕분에 나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 제법 많다.
길을 걷다가 인사를 받을 때 그 사람이 여성이면 나는 일단 당황한다.
몇 년간 내 머리를 손질해주었던 동네 미장원 아줌마를 시내에서 만나 알아보지 못했던 일,
후배의 가족과 저녁 만찬(!)을 하고 두어 달 뒤에 후배 아내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던 일,
1년 넘게 내게 할부 책값을 받아갔던 아줌아를 버스 안에서 만나 몰라봤던 일 등등.
.........................
요즘 들어서는 점입가경이다.
범위가 여성만이 아니다.
드디어 '열쇠를 손에 들고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출근하면서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면 고개를 갸우뚱해보고 가까스로 기억을 해내던 능력마져 고사되어 가는 듯하다.
엊저녁에 빵집에 들러 빵빵하게 빵을 사서 다 먹지 못하고,
오늘 아침에 출근하면서 그걸 학교에 들고 와서 먹어야지....
세수하면서도 생각했고, 옷을 챙겨 입으면서도 되새겼다.
식탁에서 굳은 빵을 한 입 우겨넣을 때까지도 못다채운 배는 출근해서 만회할거라고 다짐했다.
그런데....
지금 아무 것도 먹을 게 없어
쓴 커피만 들이키고 있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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