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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이야기

미국 역사를 다시 본다(3) - 퓨리턴

리치리치샘 2009. 9. 28. 17:08

The Puritans!

우리가 역사책을 통해 배운 바 있는 청교도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엄격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한 모범적인 기독교도의 한 그룹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이 꼭 긍정적으로만 평가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들이 영국 성공회(엄격하게 말해서 영국 왕실)와의 대립 특히 왕(영국 정교)와 당시 대수를 차지하고 있던 청교도 의회 의원과의 대립 과정에서 크롬웰의 등장으로 청교도 혁명을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왕을 몰아내고 의회 정치 시대를 열었으나 크롬웰이 종신 호민관으로 지나치게 생활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통치를 했다. 이는 왕권신수설을 믿었던 이전의 왕들과 다름없는 통치였다. 크롬웰의 죽음으로 권력을 잃고 권력은 왕에게로 되돌아가게 된다. 다시 왕실로 권력이 넘어가자 목숨을 건지고 아울러 자신들의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도망간 곳이 미국 땅이다.

 

이 이야기는 좀더 상세하게 풀어서 하면 다음과 같다.

 

1603년 3월24일, '엘리자베스 1세'가 세상을 떠났다. 평생 독신을 고집하던 여왕이므로 후계자가 없어

'튜터'왕조는 끊어지고 말았다. 왕가의 가장 가까운 혈통을 찾았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를  영국의 왕으로 모셨다. 그는 영국으로 쫓겨와 근 20년동안 런던 교외에 근신하다 참형을 당한 '메리 슈트워트' 스코틀랜드의 전 여왕과 '헨리  단리' 경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었는데, 그때 나이 37세였다.

 

'제임스' 1세는 위엄도 없었고 혀가 너무 길어 말이 분명하지도 않은데다가 수다쟁이였다. 그가 가장 잘못

한 행동은 의회와의 마찰이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영국의 왕위를 하느님이 내려주신 거라는 왕권신수설을 믿고 있었다. 그는 의회가 국민을 위하여 법율을 만드는 것은 왕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하고 이를 금지시켰다. '제임스' 1세의 독재에 대해 영국 국민들은 의회를 중심으로 들고 일어나 항거하였지만 '제임스'왕은 들은 척도 하지않아 1625년에 의회파의 일원에게 암살되고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이었다. 그도 역시 그의 아버지와 똑같이 왕권신수설을 고집하였다.

 

왕은 의회를 해산하고 9명의 의원을 런던탑에 감금시킨뒤, 의회의 간섭없이 정치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 뒤 '찰스' 1세의 전재 정치는 11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한편 청교도에 대한 국교회의 압박도 더욱 심해졌다. 1642년 국왕과 의회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국왕을 중심으로 한 왕당파와 의회를 따르는 의회파 사이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처음 2년 동안은 왕당파에게 유리하여 의회파는 수 차례에 걸쳐 패배를 맛보았다.

그러나 의회파의 '올리버 크롬웰'이 청교도를 중심으로 철기대(기병대)를 앞세우고 나오자 싸움의 양상은 바뀌었다.

 

1646년 초 전투가 끝나고 내란은 수습되었다. 절대권력을 군사력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의회중 '크롬웰'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파는 1649년 국왕을 재판에 회부하여 사형에 처한 뒤 자유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는데, 이것을 <청교도 혁명>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수 년간, 영국은 혁명군의 사령관인 '올리버 크롬'에 의해 다스려졌다. 1653년 봄, '크롬웰'은 의회를 해산하고 스스로 호민관이라는 직위에 올라, 왕과 똑같권력을 행사하며 독재정치를 펼쳤다.<출처 http://cafe.daum.net/gs-10/a1v/1378?docid=1EJJJ|a1v|1378|20090129113810&q=%C3%BB%B1%B3%B5%B5%C7%F5%B8%ED)

 

이후 다시 왕정으로 되돌아간 영국 사회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었다.

퓨리턴 즉 청교도의 일부는 이런저런 이유로 왕정과 의회가 대립하고 있었던 1630년부터 미국으로의 이주를 감행했다.

 

미국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은 주로 메사츄세츠주에 모여 살게 되었는데, 이 주의 주도가 시카고이다. 그래서 시카고를 속칭 퓨리턴시(Puritan City)라고 하고, 메사츄세츠 주를 퓨리턴 주(Puritan State)라고 부르고 있다.

 

퓨리턴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 수가 있었다. 1690년대에 메사추세츠 주에만 5만명의 청교도가 모여 살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그드르이 종교가 진정한 종교이며 모든 이들을 신봉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교회는 지역 정치의 선봉이 되어야 하며 식민지 내의 모든 사람들은 퓨리턴 교회에 봉사해야하며 지역 정부 지도자의 업무는 그러한 신념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는 이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였다.

그는 퓨리턴들이 그랬듯이 유럽의 다른 나라 사람들의 종교가 잘못되었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믿음도 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에 동의하기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벌을 주거나 죽이는 것은 죄악이며, 교인들만이 그들의 교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저 윌리엄스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책으로 저술하였다. 다른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의 벌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며, 유럽의 이주민들은 인디언의 땅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책에 썼다. 영국의 왕이 미국 땅에 사람들을 정착시킬 권리가 없다고 했다. 그 땅은 영국 왕의 것이 아니라 인디언의 땅이라고 했다.

로저 윌리엄스는 그후 메사추세츠 주에서 추방되었고, 남부로 여행을 했으며 인디언들로부터 프로비던스(로드 아일랜드주의 주도)를 구입하였다. 로드 아일랜드는 종파에 관계없이 심지어는 무신론자들까지 받아들였다. 

이러한 로저 윌리엄스의 생각은 후에 미국 정부의 중요한 통치 이념이 되었다.

 

변화는 한 순간 돌연변이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 나라, 기회의 땅 등등 미국을 수식하는 말들은 많다. 그러나 그 역사적 내면을 들여다보면 수많은 갈등의 결과임을 알 수 있다.

'퓨리턴의 초상'이라는 김수영 시인의 평론집이 있다. 한 권의 책을 포괄하는 제목으로 사용된 퓨리턴은 수십가지의 의미를 내포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많아야 중요한 의미 한 두어 가지를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김수영 시인의 '퓨리턴'은 '자유로운 생각을 가진 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지금의 미국은 혹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타국과 타인을 너무나 심하게 이래라 저래라 조종할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큰 저항에 부딛히게 될 것이 자명하다.

 

미국은 어떤 갈등 후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